640만 달러짜리 질문: 페라리는 왜 애플 디자이너를 불렀나
페라리 최초의 순수 전기차 '루체(Luce)'가 공개됐다. 조니 아이브가 디자인하고, 1000마력을 품었으며, 가격은 9억 원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은 다른 데 있다.
8년. 페라리가 전기차를 만들겠다고 처음 공언한 2018년부터 오늘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 사이 테슬라는 시가총액 세계 5위 기업이 됐고, 람보르기니는 전기차 출시를 2029년으로 미뤘으며, 포르쉐는 수천억 원을 쏟아부은 전동화 계획을 다시 내연기관 중심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페라리가 루체(Luce)를 공개했다.
숫자부터 보자: 이건 GT카가 아니라 하이퍼카다
2026년 5월 26일, 로마에서 공개된 페라리 루체의 스펙은 노골적으로 과감하다. 네 개의 모터가 각 바퀴를 독립 구동하며, 부스트 모드에서 합산 출력은 1,000마력 이상. 후륜 단독으로 832마력에 토크 7,750Nm를 발휘하고, 전륜이 282마력을 더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2.5초, 최고속도는 309km/h.
배터리는 122kWh로 현재 양산 전기차 중 최대 수준이다. 800V 시스템 기반으로 최대 350kW 급속충전을 지원하며, 주행가능거리는 530km 이상. 차체 무게는 2,260kg으로, 배터리를 얹고도 푸로산게 SUV보다 불과 90kg 무겁다.
5인승 좌석을 갖춘 페라리는 루체가 처음이다. 외형은 조니 아이브(Jony Ive)와 마크 뉴슨(Marc Newson)이 이끄는 디자인 에이전시 LoveFrom이 맡았다. 아이폰, 맥북, 애플워치를 설계한 팀이 자동차를 만든 것이다.
페라리가 외부인을 들인 이유
페라리는 수십 년간 내부 디자인 스튜디오를 고집해왔다. 플라비오 만초니(Flavio Manzoni)가 이끄는 페라리 디자인 스튜디오는 458 이탈리아, SF90 스트라달레 등 시대를 정의한 차들을 만들어냈다. 그 페라리가 처음으로 외부 디자이너에게 전권을 넘겼다.
실내는 2월 샌프란시스코 행사에서 먼저 공개됐다. 브러시드 알루미늄, 유리, 가죽, 둥근 모서리. 13,000개의 레이저 에칭 홀이 뚫린 코닝 유리 변속 노브. 볼-소켓 관절로 조수석 쪽으로 회전하는 중앙 스크린. 미니어처 아이폰처럼 생긴 스마트 키. 아이브 본인은 이 인테리어를 "악기"에 비유했다.
엔진음이 없는 전기차에서 페라리가 선택한 해법도 흥미롭다. 후축에 가속도계를 부착해 모터 진동을 기타 픽업처럼 감지하고, 불필요한 노이즈를 걸러낸 뒤 실내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페라리 사운드 매니저 안토니오 팔레르모는 이를 "악기"라 불렀다.
외관 역시 LoveFrom이 조각했다. 앞 유리가 차 노즈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글라스하우스 구조, A필러 옆에 배치된 와이퍼, 전면 23인치 후면 24인치의 엇갈린 휠 사이즈. 아이브는 "명백히 페라리지만, 단순함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다른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타이밍의 역설: 왜 지금인가
루체가 공개된 시점은 의미심장하다. 럭셔리 자동차 업계 전반이 전동화에서 발을 빼는 중이다. 람보르기니는 첫 EV를 2029년으로 연기했고, 벤틀리는 전기차 전환 목표를 2030년에서 2035년으로 늦췄다. 포르쉐는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내연기관 중심으로 전략을 재편했다.
페라리도 흔들렸다. 지난해 6월, 두 번째 전기차 출시를 2028년으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전기 럭셔리카에 대한 수요 부진." 같은 해 10월, 장기 재무 목표에 실망한 투자자들이 이탈하며 페라리 주가는 하루 만에 16% 이상 빠졌다.
그럼에도 루체는 예정대로 나온다. 2026년 말 생산 시작, 2027년 초 인도, 시작 가격 약 6억4000만 원(640,000달러). CEO 베네데토 비냐는 이 차가 라인업의 "추가"이지 "전환"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페라리의 2030년 목표는 순수 전기차 20%, 하이브리드 40%, 내연기관 40%다.
업계 일각에서는 솔직하게 말한다. "취소하기엔 너무 늦었다."
페라리 팬과 애플 팬 사이 어딘가
루체를 둘러싼 가장 큰 긴장은 디자인 정체성이다. 페라리를 사는 사람들은 페라리를 산다. 그 브랜드의 역사, 소리, 감각, 커뮤니티 전체를 사는 것이다. 그런데 루체는 이전의 어떤 페라리와도 닮지 않았다.
페라리 충성 고객들의 반응은 예측하기 어렵다. 아이브의 미니멀리즘이 458 이탈리아의 관능적 곡선을 그리워하는 트래디셔널리스트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반면 애플 생태계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의 부유층에게는 오히려 이 낯섦이 매력이 될 수도 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삼성SDI 등 한국 기업들에게 루체는 하나의 벤치마크다. 고성능 전기차에서 122kWh 배터리와 350kW 충전 속도가 새로운 기준점으로 설정됐다는 점, 그리고 자동차 디자인에서 테크 기업 출신 디자이너가 전면에 나서는 방식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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