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조 달러 기후 빚, 법정으로 간다
기후변화로 피해 본 개도국들이 선진국과 기업을 상대로 소송 러시. 과학적 증거가 쌓이면서 승소 가능성도 높아져
솔로몬 제도의 해수면은 매년 조금씩 높아진다. 차드의 기온은 매해 기록을 경신한다. 하지만 이 나라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전 세계 배출량의 0.1%도 안 된다. 반면 미국과 유럽은 지금까지 전체 배출량의 절반 이상을 쏟아냈다.
불공평하다. 그래서 이제 법정으로 간다.
200조 달러 기후 빚의 실체
숫자부터 보자. 주요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져야 할 '기후 빚'은 200조 달러에 달한다는 추산이 나왔다. 한국 GDP의 100배가 넘는 규모다.
이 빚의 근거는 명확하다.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를 태워 부를 축적한 건 선진국이지만,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기후재난은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떠안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는 2021년 태풍 오데트로 400명이 숨지고 80만 명이 집을 잃었다. 파키스탄에서는 2022년 대홍수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이들 나라의 탄소 배출량은 미미하다.
과학이 바꾼 법정의 판세
그동안 기후소송이 어려웠던 이유는 간단했다. '누구 탓인지' 증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분자가 어느 나라, 어느 회사에서 나온 건지 추적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9월 네이처에 실린 연구는 21세기 폭염들에 대한 특정 기업들의 기여도를 정확히 계산해냈다. 필리핀의 태풍 오데트 같은 극한 강우가 기후변화로 인해 2배 더 발생하기 쉬워졌다는 연구도 나왔다.
컬럼비아 로스쿨의 마이클 제라드 교수는 "이제 특정 회사의 화석연료가 특정 재난에 미친 영향을 입증하는 게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석유회사들의 마지막 방어선
그렇다면 석유회사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는 기름만 팔았을 뿐, 태운 건 소비자들 아닌가?"
셸을 상대로 한 필리핀 소송에서도 이 논리가 핵심 쟁점이다. 회사는 "배출의 대부분은 연료를 태우는 차량, 발전소, 공장에서 나온다"며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들의 시각이 바뀌고 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최근 여러 판결에서 "국가는 기후변화 영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법적 의무가 있다"고 확인했다. 독일 법원도 "대형 탄소 배출업체들이 원칙적으로 기후 피해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고 판시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흐름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까?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은 세계 8위 탄소 배출국이면서 동시에 태풍, 폭염 등 기후재난에 취약한 나라다.
국내에서도 이미 기후소송이 시작됐다. 청소년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기후소송'이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이다. 해외 사례들이 승소하기 시작하면, 국내 법원의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현대중공업, 포스코, SK이노베이션 같은 국내 대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이 해외에서 기후소송에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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