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사기 공장의 흐린 경계선,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
동남아시아 사기 단지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노예제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복잡한 현실과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실을 파헤쳐본다.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고수익 일자리'라는 달콤한 유혹에 속아 동남아시아의 외딴 건물로 향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철조망과 감시카메라로 둘러싸인 감옥 같은 현실이었다.
꿈을 팔던 사람들이 악몽을 만드는 곳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국경 지대의 사기 단지에서는 매일 수천 건의 온라인 사기가 벌어진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대만, 태국 출신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처음엔 피해자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해자가 되어간다.
사기 조직은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새로 온 사람들은 먼저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가짜 연인 관계를 만들어 투자 사기를 벌이는 '로맨스 스캠', 암호화폐 투자를 미끼로 한 '돼지 도살' 사기 등을 배운다. 목표액을 달성하지 못하면 구타나 감금이 기다린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는 이 시스템에 적응하고, 심지어 승진하여 다른 피해자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생존을 위해 선택한 길이 다른 이들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국경을 넘나드는 현대판 노예제도
이 문제가 단순한 범죄 조직의 일탈이 아닌 이유는 그 규모와 체계성에 있다. 유엔은 동남아시아 사기 단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를 최소 12만 명으로 추산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작은 도시 하나의 인구와 맞먹는 규모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이 현상이 급격히 확산됐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일자리를 찾던 젊은이들이 주요 타깃이 됐고, 온라인 사기 수법도 더욱 정교해졌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몇 달간 관계를 쌓은 뒤 거액의 투자를 유도하는 방식은 전 세계적으로 수십조 원의 피해를 낳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동남아 기반 투자 사기 피해 신고가 급증하고 있으며, 일부 한국인들이 이런 조직에 가담했다가 구출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선악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
가장 복잡한 지점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강제로 끌려온 사람이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실제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이들을 단순히 범죄자로 규정할 수 있을까?
국제사회는 이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구출 작전을 벌일 때도 누가 진짜 피해자이고 누가 자발적 가담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더욱이 일부 지역 당국이 이런 조직과 유착관계에 있어 문제 해결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태국 정부는 최근 대대적인 단속 작전을 벌였지만, 조직들은 금세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활동을 재개했다. 마치 물풍선을 누르면 다른 곳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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