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비엔날레, 아름다움과 불편함 사이
2026 베네치아 비엔날레 현장 리포트. 러시아·이스라엘 파빌리온 논란, 푸시 라이엇 시위, 국가관의 한계와 위성 전시의 가능성까지—예술제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예술 행사에 참가하러 갔다가 연기 폭탄과 맨몸 시위를 목격한다면, 그것도 예술인가—아니면 예술이 실패했다는 신호인가.
지난주 개막한 2026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11월까지 계속된다. 130년 역사를 가진 이 행사는 흔히 '미술계의 올림픽'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수십 개국의 국가관, 국제 큐레이터가 기획한 주제전, 도시 곳곳에 흩어진 위성 전시까지—베네치아 전체가 닷새 동안 하나의 거대한 전시장이 된다. 그리고 올해는, 그 혼란이 유독 날카로웠다.
파빌리온 앞의 연기와 함성
올해 비엔날레의 가장 뜨거운 쟁점은 개막 전부터 불거졌다. 비엔날레 회장 피에트란젤로 부타푸오코가 러시아와 이스라엘 파빌리온의 참가를 허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범 국가와의 공모'라는 비판과 '검열'이라는 반론이 충돌했다.
개막 당일, 러시아 파빌리온 앞에서 그 충돌은 시각적 사건으로 폭발했다. 분홍색 복면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여성들이 파빌리온 외부에 모여들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분홍·파랑·노랑 연기 폭탄이 터졌다. "피가 러시아의 예술이다!" "불복종하라!" 구호가 울려 퍼졌다. 여성들은 건물 외벽을 타고 오르고, 상의를 벗어 가슴에 새긴 슬로건을 드러냈다. 러시아 대사는 파빌리온 안에 움츠러들었고, 헬리콥터 한 대가 상공을 맴돌았다.
이들은 푸시 라이엇이었다. 2012년 모스크바 대성당 퍼포먼스로 투옥된 이후, 월드컵 결승전과 동계올림픽을 뒤흔들었던 그 집단. 약 20분간의 퍼포먼스는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다.
중요한 것은 그 눈빛이었다. 분홍 복면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눈에는, 군중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예술이 '소통'이라고 개막 연설의 귀빈들은 말하지만, 가장 강렬한 예술적 표현은 때로 대화가 아니라 독백에 가깝다. 푸시 라이엇의 퍼포먼스가 그랬다.
국가관의 딜레마, 위성 전시의 가능성
비엔날레의 공식 주제전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는 카메룬 출신의 큐레이터 코요 쿠오가 기획했으나, 그는 간암 진단을 받은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다카르에서 열린 마지막 회의 이후, 5인 위원회가 그의 구상을 이어받았다. 결과는 안타깝게도 실망스러웠다. 즉흥적인 설치물과 어설픈 회화, 정체성 정치·생태 위기·탈식민주의·웰니스를 반복해서 나열하는 벽면 텍스트들. 작품 레이블마다 등장하는 '프랙티스(practice)'라는 단어는 예술 고유의 긴장감을 희석시키는 관료적 언어처럼 읽혔다.
국가관들도 대체로 실망스러웠다. 오스트리아관은 예외였지만, 그 이유가 유쾌하지는 않다. 퍼포먼스 아티스트 플로렌티나 홀징어는 파빌리온을 통째로 누드 퍼포먼스 공간으로 변환했다. 제트스키를 타는 나체 여성, 거대한 종의 추가 된 나체 여성, 이동식 화장실 폐수를 정화해 수조에 담고 그 안에 네 시간씩 떠 있는 나체 여성. 대규모 관광과 생태 파괴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주목을 끌기 위한 절박한 시도처럼 보였다. 미국관은 반대 극단이었다. 유타 출신 조각가 알마 알렌의 추상 조각들은 지나치게 얌전해서, 팜비치 갤러리의 인테리어 소품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관람객들은 무표정으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반면 도시 곳곳의 위성 전시들은 달랐다. 케냐 출신 영국 화가 마이클 아미티지는 팔라초 그라시에서 이주민, 닭 도둑, 코로나 통금을 몽환적 색채로 담아냈다. 인도 출신 80대 예술가 날리니 말라니는 고야의 《전쟁의 참화》 판화 위에 자신의 이미지를 겹쳐 쌓아 올리는 대형 애니메이션으로 협소한 소금 창고를 빛의 회랑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35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캐나다 화가 매튜 웡의 전시—반 고흐와 마티스에서 영감받은 친밀하고 아름다운 회화들이 팔라초 티에폴로 파시의 붉고 초록빛 벽 사이에서 빛났다. 기자가 그 공간에서 경험한 가장 깊은 순간이었다고 했다.
사우디아라비아관도 눈에 띄었다. 사우디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 다나 아와르타니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에서 지난 15년간 파괴된 건축물의 바닥 모자이크를 재현했다. 타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균열되도록 설계됐다. 소프트파워가 살인을 덮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냉소적 시각과, 그럼에도 작품 자체의 진정성 사이에서 관람객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예술은 왜 고통에서 시작되는가
비엔날레의 마지막 날, 기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티치아노의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를 마침내 찾아냈다. 로마 당국에 맞서다 산 채로 불에 구워지는 성인의 몸, 그것을 찌르는 긴 쇠꼬챙이, 그리고 그 고통에 완전히 무관심한 주변 인물들. 비계로 둘러싸인 채 보수 중인 성당 안에서, 그 그림은 극한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무감각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독일 화가 한스 하르퉁의 전시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주제에 닿았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살아남고, 외인부대에서 싸우다 한쪽 다리를 잃고, 드레스덴 폭격으로 초기 작품 대부분을 잃은 그는 침묵을 견디지 못했고, 음악 없이는 작업할 수 없었다. 그의 추상화—짙고 밝은 파랑의 부유하는 면들, 검은 덩어리, 베네치아의 구름에서 훔쳐온 듯한 빛의 마름모—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비엔날레는 결국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운다. 예술이 국가의 외교 도구로 동원되고, 주목을 위한 퍼포먼스로 소비되고, 2,000만 달러짜리 저주받은 팔라초의 마케팅 배경이 되는 세계에서—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술 앞에서 멈추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변환하는 능력, 혹은 적어도 고통을 직면하게 만드는 능력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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