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배심이 기소를 거부한다는 것의 의미
트럼프 행정부 검사들이 연이어 대배심에서 기소 거부당하는 현상. 미국 사법 시스템에서 벌어지는 전례 없는 일의 배경과 의미를 분석한다.
"대배심은 햄 샌드위치라도 기소한다"는 유명한 농담이 있다. 검사가 원하는 대로 거의 자동으로 기소장을 발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워싱턴에서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2월 10일, 연방 대배심이 트럼프 대통령이 지목한 '적들'에 대한 기소 요청을 거부했다. 이는 단순한 법정 드라마가 아니다. 미국 사법부와 행정부 간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다.
전례 없는 대립의 시작
사건의 발단은 2025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당 소속 의원 6명이 군부와 정보기관 관계자들에게 "불법적인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알리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에 격분한 트럼프는 이들을 "선동죄"로 고발했고, 선동죄는 사형까지 가능한 중범죄다.
지닌 피로 워싱턴DC 연방검사가 이들을 기소하려 했지만, 대배심은 거부했다. 문제는 이것이 첫 번째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몇 달 동안 트럼프 행정부 검사들이 대배심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있다.
존 E. 존스 3세 전 연방판사는 "20년 판사 생활 중 대배심이 기소를 거부한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이례적이라는 뜻이다.
대배심실에서 벌어지는 일
대배심은 16명에서 23명의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다. 검사가 증거를 제시하면, 이들은 범죄가 일어났을 '상당한 이유'가 있는지만 판단한다. 유죄 여부를 가리는 게 아니라 재판을 열 만한 근거가 있는지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일방적 과정이라는 점이다. 변호사도 없고, 검사가 원하는 증거만 제시한다. 그런데도 대배심이 기소를 거부한다는 것은 "당신이 제시한 사실을 모두 받아들여도 이 사건은 기소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대배심 절차는 철저히 비밀이다. 연방판사가 허가하지 않는 한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따라서 검사가 무엇을 제시했는지, 대배심이 왜 거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신뢰 잃은 사법부
존스 전 판사는 이 현상을 더 큰 맥락에서 해석한다. "법무부가 사법부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연방판사들이 정부 검사들의 말을 믿지 않기 시작했고, 이제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대배심도 마찬가지라는 분석이다.
특히 트럼프가 의원들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선동죄"라고 공개적으로 규정한 것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이는 적법절차를 파괴하는 행위다. 대배심원들도 대통령의 발언을 알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도 공정성을 유지하려 한다는 게 존스의 해석이다.
무기화된 사법부의 대가
검사가 대배심에서 거부당하면 다시 시도할 수 있다. 실제로 리티샤 제임스 사건에서 버지니아 검찰이 재시도했다. 하지만 존스는 "두 번 망신당할 위험이 크다"고 지적한다.
더 큰 문제는 기소 과정 자체가 처벌이 된다는 점이다. 기소당하면 변호사를 고용해야 하고,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싸워야 한다. 명예도 실추된다. 존스는 "과정 자체가 처벌이고, 아마 대통령이 원하는 것도 그것일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선 시스템이지만, 이는 민주주의 국가의 견제와 균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행정부가 사법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 때, 시민들로 구성된 대배심이 마지막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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