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국들의 반격, 강대국 시대에 맞선 '제3의 길
미국이 기존 세계 질서에서 이탈하며 강대국 경쟁 시대가 열린 가운데, 캐나다 총리가 다보스에서 중간국들의 연합 필요성을 강조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구축한 세계 질서에서 스스로 이탈하며 중국, 러시아와 함께 수정주의 진영에 합류했다. 19세기식 강대국 세력권 경쟁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소외된 나머지 국가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다보스에서 울린 경종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던진 메시지는 명확했다. "중간국들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가 된다."
카니 총리는 기존의 자유주의 규칙 기반 질서가 모든 결함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국가들의 안보와 번영에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끝났다. 우리가 언젠가 과거의 정상 상태로 돌아갈 '전환기'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강대국들은 당분간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 시장 규모도, 군사력도, 조건을 좌지우지할 영향력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간국들은 그렇지 않다. 패권국과 양자 협상만 할 때 우리는 약자의 입장에서 협상한다.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누가 더 순종적인지 서로 경쟁한다."
진짜 주권 vs 주권의 흉내
카니 총리가 지적한 핵심은 '진짜 주권'과 '주권의 흉내'를 구분하는 것이다.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종속을 받아들이면서도 주권을 행사하는 척하는 것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구체적이다. 먼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불러야 한다. '규칙 기반 국제 질서'라는 표현을 마치 여전히 작동하는 것처럼 사용하지 말고, 실제 모습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장 강력한 국가들이 경제 통합을 강압의 무기로 사용하는 강대국 경쟁 체제라고.
또한 일관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한쪽의 경제적 위협은 비판하면서 다른 쪽의 그것에는 침묵하는 것은 무력함의 서사를 뒷받침할 뿐이다.
분산된 권력의 세계 질서
앤 마리 슬로터 전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의 분석은 카니 총리의 비전과 맥을 같이 한다. 그녀는 19세기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 강대국들이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오늘날의 세계 지도에는 도시, 주, 성, 다국적 기업, 시민사회 단체, 중간국들, 그리고 아세안부터 아프리카연합까지 다양한 지역 기구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들 모두는 기후 변화부터 팬데믹, 그리고 강대국들의 약탈로부터 오는 경제적·안보적 위협까지 공통의 글로벌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는 무력함의 지도가 아니라 '분산된 권력'의 지도다. 여기서 각 행위자들은 "다중 파트너십과 다중 정렬"을 형성하며, 무역, 금융, 기후 완화, 기술 등 다양한 역량을 중심으로 조직된 핵심 '허브'를 만들어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한다.
한국은 어디에 서야 할까?
이러한 중간국 연합의 논의에서 한국의 위치는 흥미롭다. 삼성전자와 같은 글로벌 기업을 보유하고, 문화 콘텐츠로 소프트파워를 발휘하며, 기술력으로 인정받는 한국은 전형적인 중간국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한국은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다. 반도체, 배터리, 조선업 등 핵심 산업에서 글로벌 공급망의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는 만큼, 카니 총리가 말한 '다각화'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다.
현대자동차의 전기차 전략이나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이 특정 국가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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