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딜레마, 생존을 위해 영혼을 파는가
멜론 재단이 인문학 연구비의 절대 강자가 되면서, 학자들이 사회정의 연구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돈을 위해 학문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현실을 들여다본다.
8조원 규모의 기부재단이 미국 인문학계를 좌우하고 있다. 학자들은 연구비를 받기 위해 자신의 연구 주제를 '사회정의'로 포장하고 있고,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앤드류 W. 멜론 재단은 2024년 5억 4천만 달러(약 7,800억원)의 연구비를 지급했다. 같은 해 미국 국립인문학재단의 예산은 7,8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사실상 한 민간재단이 미국 인문학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된 것이다.
1964년의 경고가 현실이 되다
1964년, 미국 국립인문학위원회는 한 가지 우려를 표명했다. "인문학이 자유로워야 하는 이유는 품질, 가치, 감정, 삶의 목표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를 통제하는 것은 의견을 독재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인문학 지원을 위한 연방 기구 설립을 권고하면서도, 동시에 경고했다. 어떤 단일 기관도 연구비 지급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됐다.
2018년 엘리자베스 알렉산더가 멜론 재단 회장에 취임한 후, 재단은 "모든 연구비 지급에서 사회정의를 우선시"한다고 선언했다. 2020년부터는 "더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아름다운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연구에는 한 푼도 지원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돈을 따라 바뀌는 연구 주제
한 종교학 교수는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대학의 연구비 담당자는 냉정했다. "순수 연구라서 멜론 재단 지원을 받기 어려울 것 같다. 지역사회 파트너나 인종 정의와 관련이 없어서."
20여 명의 학계 관계자들과 인터뷰한 결과,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 교수는 "멜론이 매우 강력해서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싶지 않다"고 익명을 요구했다.
실제로 여러 학자들이 연구비를 받기 위해 자신의 연구를 '사회정의' 관점으로 재포장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한 교수는 "멜론 재단 담당자가 우리 제안서 작성을 직접 도왔는데, 사회정의 전문용어를 상당히 많이 추가하라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전통적 연구의 종말
변화는 구체적인 숫자로도 나타난다. 2010년대 멜론의 '논문 완성 펠로우십'은 15세기 여성 종교문학부터 데카르트의 무한 개념까지 다양한 주제를 지원했다. 하지만 2022년 이 프로그램은 폐지됐다.
새로 만들어진 '논문 혁신 펠로우십'은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을 구축할 수 있는 학자"만 지원한다. 2025년 수상자 45명 전원이 정체성이나 사회정의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최근 멜론의 지원 사례들을 보면:
- 포틀랜드 주립대 여성·젠더·섹슈얼리티학과의 "통제 불가능" 프로그램
- 텍사스 A&M 산안토니오 캠퍼스의 "국경지대 셰익스피어 집단"
- 노스웨스턴대의 "흑인 자유를 구현하는 흑인 춤 관행" 연구
- UC 데이비스의 "파시즘 시대의 트랜스젠더 해방" 워킹그룹
한국 인문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 인문학 연구비 역시 한국연구재단과 몇몇 대형 재단에 집중돼 있다. 연구자들이 "트렌드"에 맞춰 연구 주제를 조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서울대 한 교수는 "요즘 연구비 신청서에는 '사회적 가치'나 '실용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고 말했다. 순수 인문학 연구보다는 융합 연구나 현실 적용 가능한 주제가 선호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인문학
멜론 재단의 필립 브라이언 하퍼 프로그램 디렉터는 "멜론의 역할은 인문학의 영구적인 돼지저금통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멜론은 이미 미국 인문학의 생명줄이 됐다.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멜론 재단은 공립대학과 소외계층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늘리고 있다. 2024년에는 250억원을 들여 5개 공립대 인문학과 학생들의 유급 인턴십을 지원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분명 가치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16세기 프랑스 문학 연구보다 소외계층 학생 지원이 더 시급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선택의 강요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보수 진영의 위선
흥미롭게도 보수 진영에서는 인문학의 '좌편향'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대안적 연구비는 제공하지 않고 있다. 고전과 전통을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억만장자들도 실제로는 한 푼도 지원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립인문학재단 예산을 더 삭감하면, 멜론 재단의 영향력은 오히려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보수 진영의 공격이 의도와 반대로 진보적 재단의 독점력을 강화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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