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 노예를 둔 집터에서 노예제 전시관을 철거한 이유
트럼프 정부가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노예제 전시관을 철거하면서 역사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미국 건국 25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
1796년 5월 21일 저녁, 오나 저지(Ona Judge)는 목숨을 건 결단을 내렸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집에서 가족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 그녀는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 자유를 향해 떠났다.
그로부터 230년 후인 지난달, 그녀가 머물렀던 필라델피아 대통령 관저 터에 설치된 노예제 전시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립공원관리공단을 통해 "자유와 노예제: 새로운 국가 건설" 전시관을 철거한 것이다.
지워진 발자국들
철거된 전시관은 단순한 패널 몇 개가 아니었다. 오나 저지가 자유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바로 그 보도에는 여성의 신발 모양을 한 발자국들이 새겨져 있었다. 워싱턴 부부가 대통령 관저에서 부린 9명의 노예들의 삶을 조명한 34개의 설명 패널도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필라델피아시는 즉각 반발했다. 체렐 파커 시장은 "2006년부터 시와 연방정부 간 협력 협정에 따라 전시 변경 시 사전 협의가 필요하다"며 내무부 장관과 국립공원관리공단 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전시관을 만들기 위해 16년간 싸워온 필라델피아 출신 변호사 마이클 코드는 "역사를 표백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연방법원은 현재 보관 중인 전시 패널들의 손상을 방지하라고 정부에 명령한 상태다.
건국 250주년을 앞둔 역사 전쟁
이번 철거는 우연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 주에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을 전면 폐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동시에 워싱턴 D.C.와 알링턴 국립묘지에 남부연합 기념비 2개를 복원했다.
템플대학교 아프리카학과 교수 티모시 웰벡은 "건국의 아버지들을 폄하한다고 여겨지는 자료들을 제거하라"는 2025년 행정명령의 연장선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1기 트럼프 정부는 니콜 한나 존스의 '1619 프로젝트'에 대항해 '1776 위원회'를 만들어 노예제 역사 서술에 제동을 걸었다.
2026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선언서 서명 250주년을 맞는다. 건국 정신을 기리는 이 시점에서 벌어진 노예제 전시관 철거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미국이 자신의 역사를 어디까지 들여다볼 것인가를 둘러싼 근본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다른 시선들
하지만 모든 미국인이 이 철거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층은 "건국의 아버지들의 업적을 폄하하는 일방적 서술"이라며 철거를 지지한다. 그들은 워싱턴이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보다는 미국 독립과 민주주의 건설에 기여한 공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진보층과 역사학자들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에모리대학교 에리카 암스트롱 던바 교수는 저서 "절대 잡히지 않다"에서 오나 저지의 이야기를 통해 건국 초기 노예제의 모순을 생생히 그려냈다.
국제적으로도 시선이 다르다. 유럽 언론들은 "미국의 역사 수정주의"라며 우려를 표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는 "조상들의 고통을 지우려는 시도"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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