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세계 경제의 '보험사'에서 '조폭'이 된 날
이란 전쟁, 트럼프 관세, 달러 패권의 균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소장 애덤 포젠이 진단하는 세계 경제의 현주소와 한국이 받을 충격.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세계에 하나의 약속을 했다. '우리가 바다를 지키고, 규칙을 만들고, 시장을 열겠다. 대신 너희는 우리 국채를 사고, 달러로 거래하고, 할리우드 영화 값을 내라.' 그 약속이 80년 만에 흔들리고 있다.
2026년 4월, 이란과의 전쟁이 장기화되고,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소장 애덤 포젠은 데이비드 프럼과의 대담에서 냉정한 진단을 내놓았다. "미국은 보험회사에서 보호 갈취 조직으로 변했다." 이 한 문장이 오늘날 세계 경제가 처한 현실을 가장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에너지 충격: '우리는 괜찮다'는 착각
트럼프 대통령은 반복해서 말한다. "미국은 에너지 순수출국이다. 우리는 괜찮다." 숫자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전 세계 원유의 20%가 페르시아만에서 나오지만, 그 중 80%는 아시아로 향한다. 미국의 직접 의존도는 낮다.
하지만 포젠은 이 논리의 허점을 정확히 짚는다. 에너지 시장은 하나의 글로벌 시장이다. 일본, 한국, 독일, 영국이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웃돈을 부르면, 그 가격 상승은 미국 소비자의 주유소 영수증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에너지를 수출한다고 해서 세계 가격에서 격리되는 게 아니다. 수출하는 순간, 세계 가격을 수입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 충격을 정면으로 맞는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 이상인 한국에게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은 곧바로 전기요금, 물가, 그리고 삼성전자·현대차·SK하이닉스 같은 제조업 대기업의 생산 비용으로 전이된다. 포젠이 경고하는 '개발도상국 및 중간소득 국가의 통화 약세·금리 인상·구매력 감소' 시나리오는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
관세의 진짜 비용: 보이지 않는 투자 공백
2025년 4월 트럼프 행정부의 '해방의 날' 관세 발표 이후, 미국 경제에서 AI 섹터를 제외한 기업 투자는 완전히 멈췄다. 12~14개월 동안 투자가 정체된 것이다.
역설적인 건 관세 외에도 투자를 촉진할 요소들이 충분했다는 점이다. 감세, 규제 완화, 에너지 가격 하락(이란 전쟁 이전까지), M&A 규제 완화. 모든 조건이 갖춰졌음에도 기업들은 투자를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불확실성이다.
포젠은 이를 수치로 환산한다. 미국 경제의 연간 투자 규모는 통상 4~5조 달러다. 투자가 멈추면 그 절반인 2.5조 달러 수준으로 쪼그라든다. 이 차이가 장기적으로 GDP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 손실로 쌓인다. 관세 자체의 직접 비용보다 '관세가 올 수도 있다'는 공포가 더 큰 피해를 낳은 셈이다.
대법원이 대규모 관세를 위헌으로 판결하고 환급을 명령했지만, 포젠은 냉정하게 평가한다. "망치를 빼앗긴 게 아니다. 볼핀 해머 하나를 못 쓰게 하고 밴드에이드를 붙여준 것뿐이다. 망치를 다시 들 수 있다는 위협은 여전히 살아 있다."
달러 패권의 균열: 보험사에서 조폭으로
이 대담의 핵심은 단순한 경기 전망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국은 왜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는가?
포젠의 답은 명쾌하다. 미국은 '보험회사'였다. 바다의 안전을 보장하고, 재산권을 지키고, 미 국채라는 안전 자산을 제공했다. 세계는 그 대가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하고, 미국 국채를 샀고, 미국은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30년 모기지가 미국에만 존재하는 이유도, 미국인이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는 이유도 이 시스템 덕분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구조를 바꿨다. "좋은 경제 갖고 있네요. 뭔가 일이 생기면 안 좋을 텐데." 포젠이 묘사하는 보호 갈취 조직의 언어다. 보험료를 올리는 게 아니라, 보험 자체를 협박 도구로 전환한 것이다.
그 결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유럽은 미국산 LNG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에너지원 다변화에 나섰다. 영국과 일본, 이탈리아는 F-35의 대안으로 공동 전투기 개발에 착수했다. 캐나다는 인터넷 인프라의 미국 의존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동맹국들이 미국을 신뢰할 수 없는 공급자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시각에서 이 변화는 특히 예민하다. 한국은 안보에서 경제까지 미국 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급망, 현대차의 미국 시장 접근성, 한국 국채의 달러 연동성 모두 이 시스템 위에 서 있다. 미국이 '조폭'처럼 행동하기 시작할 때, 한국은 어떤 선택지를 갖고 있는가?
역사의 교훈: 대공황과 패권의 종말
포젠과 프럼은 두 개의 역사적 선례를 소환한다.
첫째는 대공황이다. 경제사학자 찰스 킨들버거의 유명한 나선형 차트. 1929년 주식 시장 붕괴 이후, 각국이 서로를 차단하기 시작했고, 신뢰가 무너지면서 세계 무역이 내부로 수축했다. 아이폰 나사못을 각자 만들어야 하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가난해진다.
둘째는 패권의 역사다. 지난 500년간, 세계 최강국은 항상 2위부터 10위까지의 연합에 의해 무너졌다. 합스부르크도, 부르봉 왕조도 그렇게 쓰러졌다. 미국이 이 패턴을 깬 방법은 단순했다. 강대국 지위를 3위~10위에게 위협이 아닌 이익으로 만든 것. 하지만 미국이 '전통적 강대국'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 연합은 미국을 향해 형성될 수 있다.
포젠의 결론은 무겁다. "지금 당장은 중국이 너무 나쁜 행위자라 반미 연합을 만들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행동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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