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관세 앞에서 웃는 유럽 기업들, 정작 발목은 EU가 잡는다
EIB 설문조사 결과, 유럽 기업들은 미국 관세보다 EU 내부 규제와 관료주의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역내 시장 통합의 허와 실.
프랑스 와인 수출업체 피에르 마르탱은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의 25% 관세 폭탄을 맞았다.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1년 후 그의 회사는 오히려 성장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아시아 시장 개척과 프리미엄 전략으로 관세 충격을 흡수한 것이다.
마르탱의 사례는 예외가 아니다. 유럽투자은행(EIB)이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럽 기업들은 미국 관세에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걸림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관세보다 무서운 ‘내부의 적’
EIB 조사 결과, 유럽 기업 68%가 미국 관세의 영향을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답했다. 반면 EU 내부 규제와 관료주의를 “사업 확장의 주요 장애물”로 꼽은 기업은 74%에 달했다.
특히 독일 중소기업들의 불만이 컸다. 한 독일 기계 제조업체 CEO는 “미국에 수출할 때는 관세만 내면 되지만, 프랑스에 납품하려면 27개국 각각 다른 인증을 받아야 한다”며 토로했다.
EU 단일시장이라는 간판과 달리, 실제로는 여전히 27개의 서로 다른 시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디지털 서비스 규제만 해도 국가별로 해석이 제각각이다.
승자와 패자의 명암
미국 관세에 대한 유럽 기업들의 대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승자는 혁신과 다각화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업들이다. 독일 BMW는 중국 생산 확대로,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들은 아시아 마케팅 강화로 관세 충격을 상쇄했다.
반면 패자는 미국 의존도가 높은 전통 제조업체들이다. 특히 철강과 알루미늄 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이들조차 “미국 관세보다 EU 내 탄소국경세 준비가 더 골치”라고 입을 모은다.
흥미로운 점은 관세 대응 과정에서 유럽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오히려 강화됐다는 것이다. 위기가 혁신을 촉진한 셈이다.
브뤼셀의 딜레마
EU는 “전략적 자율성”을 외치며 미국 의존도를 줄이려 하지만, 정작 역내 기업들은 내부 장벽에 더 시달리고 있다. 이는 EU 통합 정책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낸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2030년까지 진정한 단일시장 구축”을 약속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실현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특히 디지털 전환과 그린 딜 정책이 겹치면서 규제 복잡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 프랑스 스타트업 창업자는 “실리콘밸리보다 파리에서 사업하기가 더 어렵다”고 푸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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