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이 결과보다 나중에 올 수 있다면?
양자역학 실험에서 사건의 순서 자체가 확률로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 인과율이 흔들린다는 게 우리 일상과 기술에 어떤 의미인가?
"A가 먼저 일어났는가, B가 먼저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둘 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어떨까. 황당하게 들리지만, 물리학자들은 지금 그 가능성을 실험으로 입증하는 중이다.
시간의 순서가 확률로 존재한다
몇 주 전 발표된 실험은 단순한 양자 기이함을 넘어선다. 연구팀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 순서가 동시에 중첩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을 설계했다. A→B가 일어났는지, B→A가 일어났는지가 측정 전까지 확률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양자 중첩을 떠올려야 한다. 전자가 관측 전까지 여러 위치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듯, 이번 실험은 인과관계의 순서 자체가 중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자들은 이를 "인과 순서의 중첩(superposition of causal orders)"이라 부른다.
이 아이디어 자체는 새롭지 않다. 양자 스위치(quantum switch)라는 이론적 프레임워크로 10년 이상 논의돼 왔다. 그러나 실험적으로 허점을 줄여가며 증명하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연구팀은 현재 실험에 몇 가지 허점이 남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제거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 맥락을 이해하려면 10년 전 이뤄진 한 실험을 되짚어야 한다. 얽힌 광자 쌍에서 한쪽 광자가 장치를 통과한 뒤, 다른 쪽 광자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첫 번째 광자의 행동을 소급해 결정하는 실험이었다. 측정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광자의 과거 행동을 바꾼 것처럼 보였다. 당시엔 해석의 여지가 많았지만, 이번 연구는 그 질문을 훨씬 정밀하게 다듬은 것이다.
왜 지금, 이 실험이 중요한가
순수 물리학 논문이 왜 지금 주목받는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양자컴퓨팅 업계가 실질적인 응용 단계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IBM,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국내의 삼성과 KAIST 연구팀까지, 양자컴퓨터의 오류 수정과 연산 효율을 높이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인과 순서의 중첩"은 이론적으로 특정 연산을 기존 방식보다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특정 채널을 통해 정보를 전달할 때, 어떤 순서로 채널을 통과하는지를 중첩 상태로 유지하면 통신 효율이 높아진다는 것이 이미 이론적으로 제시됐다.
둘째, 이 실험은 우리가 물리 법칙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에 균열을 낸다. 인과율—원인이 결과보다 먼저 온다는 원칙—은 물리학의 근간이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직관의 토대다. 만약 인과율이 양자 수준에서 절대적이지 않다면,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시도에도 새로운 단서가 생긴다. 두 이론의 통합은 현대 물리학의 가장 오래된 숙제다.
세 가지 시각에서 본 이 실험
연구자 입장에서 이번 결과는 조심스러운 흥분이다. 허점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아직 결론이 아니다. 그러나 허점을 제거할 경로가 보인다는 점에서, 다음 실험 설계의 방향이 뚜렷해졌다.
양자컴퓨팅 기업 입장에서는 당장의 제품 로드맵보다는 5~10년 후를 내다보는 기초 연구의 영역이다. 인과 순서 중첩을 활용한 알고리즘이 실제 하드웨어에서 구현되려면 오류율 제어, 큐비트 안정성 등 선행 과제가 산적해 있다.
철학자와 인지과학자 입장에서는 더 근본적인 불편함이 있다. 인간의 인지 자체가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전제로 구성돼 있다. "A 다음에 B"라는 서사 구조 없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이 실험이 물리 법칙을 바꾸기 전에, 우리의 언어와 개념 체계가 먼저 흔들릴 수 있다.
한국의 맥락에서 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양자컴퓨팅 관련 반도체 소재 연구에 이미 투자하고 있다. 인과 순서 중첩이 실용화될 경우, 이를 구현하는 하드웨어 설계는 완전히 새로운 아키텍처를 요구할 수 있다. 지금 기초 연구의 방향이 10년 후 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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