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미국이 던진 질문, 지금도 유효한가
1916년 랜돌프 본이 제시한 '초국가적 미국' 개념이 현재 다문화 사회 논쟁에 던지는 시사점을 살펴본다.
1915년, 미국 전역을 누비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진정한 미국인"이 되려면 모든 이민자가 완전히 "미국화"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독일계 미국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같은 "하이픈 미국인"의 존재는 "국가를 파멸로 이끄는 확실한 방법"이라며 강력한 동화정책을 주장했다.
하지만 1년 뒤, 젊은 지식인 랜돌프 본은 애틀랜틱지에 기고한 "초국가적 미국"이라는 글에서 정면으로 반박했다. "왜 이민자들이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면 안 되는가?" 본의 이 질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다문화 사회가 고민하는 핵심 문제다.
전쟁의 공포가 키운 배타적 민족주의
1910년대 중반 미국은 유럽 대전쟁(1차 대전) 참전을 앞두고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몰려든 대규모 이민 물결은 이미 미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전쟁 분위기는 이민자들에 대한 의심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5년 의회 연설에서 "불충의 독을 우리 국가 생명의 동맥에 주입한" 이민자들을 맹비난했다. "열정과 불충, 무정부주의의 피조물들은 분쇄되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당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본은 1914년 여름 독일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 현장을 목격했다. 군국주의가 어떻게 순식간에 획일적 순응으로 변하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원칙을 잊어버리는지 직접 경험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군사적 준비"를 외치는 목소리가 충성심과 소속감에 대한 경직된 정의와 결합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용광로 이데올로기에 던진 근본적 질문
본이 제시한 "초국가적 미국" 개념은 단순히 다문화주의의 초기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지배적이던 "용광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만약 용광로가 실패했고 하이픈 미국인들이 여전히 하이픈을 달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것 아닌가?" 본의 관점에서 새로 온 이민자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박탈하고 그들을 맞지도 않는 앵글로색슨 틀에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미국적이지도 않았다. 당시 미국의 소위 앵글로색슨 문화 상당 부분이 영국의 관습과 전례에 대한 "비굴한 충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 것이다.
본은 미국을 "세계 민족들의 독특한 사회학적 구조"라고 정의했다. 국가의 역동성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에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포용력 있는 미국은 잔혹한 군사 분쟁에 휩싸인 구세계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봤다.
장애인 지식인이 꿈꾼 '사랑받는 공동체'
본 자신도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 출생 시 산과용 집게로 인해 얼굴이 기형이 되었고, 어린 시절 척추 결핵으로 성장이 멈추고 척추가 휘었다. 자신의 장애와 차이를 예리하게 인식하며 살아온 그는 1911년 애틀랜틱지에 이에 대한 날카로운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컬럼비아 대학 재학 시절, 본은 활발한 지적 교류 속에서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꼈다. 토론하고 논쟁하며 궁극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개성을 존중하는 "사랑받는 공동체"의 기초라고 믿었다. 대학 모델을 국가 전체로 확장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적 표현들"에 대한 "지적 공감"에 기반한 국가. 그런 공동체는 "분노가 아니라 이해를 목적으로 할 것이며, 그런 공감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을 가져올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시대를 앞선 비전의 좌절
하지만 본의 아이디어는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전쟁으로 향하는 미국에서 이민에 대한 공포는 더욱 증폭됐다. 본이 "사랑받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한 국가 교육 서비스 대신, 많은 이들은 해외 개입과 징병제야말로 "분열된 충성심"을 가진 이민자들에게서 "하이픈을 뽑아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즉각적인 미래는 본이 아니라 그가 반대한 세력들의 것이었다. "초국가적 미국" 이후 본이 쓴 더욱 강경한 반전 글들은 그를 주류 출판계에서 퇴출시켰다. 당시의 광범위한 외국인 혐오는 이민 제한법, 반대 의견 탄압 강화, "100퍼센트 미국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건 전국적 쿠클럭스클랜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본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했다. 1918년 독감 대유행의 희생자가 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부활한 아이디어, 여전한 질문들
본의 아이디어는 결코 완전히 잊히지 않았다. 1960년대에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고, 1965년에는 그의 작품 모음집이 출간됐다. 같은 해 이민국적법이 1920년대부터 시행된 제한 조치들을 뒤집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사람들이 본처럼 "그토록 새로운 인간 연합의 헤아릴 수 없는 가능성에 전율하지 않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적으로 다시 배타적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유럽의 난민 위기, 미국의 이민 정책 논란, 그리고 한국의 다문화 사회 논쟁까지. 본이 100년 전 던진 질문들이 다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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