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민권자인데도 '불법체류자' 의심받는 라티노들
트럼프 정부의 대규모 추방 작전으로 미국 태생 라티노 시민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들의 변화하는 일상과 정치적 파급효과를 살펴본다.
베로니카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이다. 국경일마다 성조기를 게양하고, 야구경기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국가를 부른다. 하지만 지난달 아들 야구경기를 보다가 다른 엄마와 스페인어로 대화하던 중 문득 멈췄다. '다른 부모들이 우리를 불법체류자로 의심해서 신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걱정은 비단 베로니카만의 것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규모 추방 작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라티노 시민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시민권자도 예외가 아닌 현실
2주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벌어진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이민단속 과정에서 미국 시민권자가 체포되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베로니카는 14살 아들과 심각한 대화를 나눴다. 만약 법 집행관이 체류 자격을 묻는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였다.
"내가 더 어두운 피부색을 가지고 있어서 당국이 나에게 더 집중할 거야"라며 "나는 미국 시민이고, 너는 다시 나를 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퓨 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 태생 라티노의 3분의 2가 지난 1년간 상황이 악화됐다고 답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47%는 대규모 추방 작전으로 인해 거주 지역에서 덜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일상 속 깊숙이 스며든 불안
이들의 일상은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 출생증명서나 여권 사진을 항상 휴대하고, 변호사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둔다. 친구들과 고객들로부터 이민단속 정보를 미리 전달받기도 한다.
피닉스에 사는 한 27세 금융업 종사자는 ICE 차량을 피해 출근길을 바꿨다고 했다. 한 소상공인은 어머니가 불법으로 미국에 왔다는 이유로 자신의 시민권이 박탈될까 봐 걱정한다.
특히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 일부 학생들은 자신의 인종 때문에 대학 장학금이 취소될 수 있는지 묻기도 하고, 단속 가능성 때문에 원격 수업을 선호하기도 한다.
17세 로버트는 축구를 하고 스페인어를 배우며 좋은 성적을 받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1890년대 후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주했고, 로버트는 애리조나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미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적 파급효과의 시작
이런 소외감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토마스 히메네스 사회학 교수는 "이런 전술은 누가 이 나라에 속하는지, 누가 도덕적으로 합당한지에 대한 메시지를 보낸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정치적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달 텍사스 특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트럼프가 17포인트 차이로 승리했던 깊은 빨간색 지역에서 승리했다. 이는 트럼프의 이민 작전과 경제 상황에 실망한 라티노 유권자들의 이탈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의 리처드 헤레라 정치학 명예교수는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대안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민 의식의 등장
흥미롭게도 이런 위기감은 오히려 시민 의식을 강화시키고 있다. 미니애폴리스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당한 지위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시민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달 마리코파 카운티의 인기 레스토랑 체인이 이민당국의 단속을 받은 후, 수천 명의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나와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곧 투표권을 갖게 될 세대다. 베로니카의 아들도 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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