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봉투 하나에도 전쟁이 담겨 있다
이란 전쟁 장기화로 한국의 나프타 공급이 30% 급감했다. 플라스틱 포장재부터 반도체 냉각제까지, 전쟁의 충격파는 우리 일상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마트 계산대에서 비닐봉투를 집어 드는 순간, 그 얇은 플라스틱 한 장이 중동의 전쟁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란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한국 경제는 예상보다 훨씬 촘촘하게 얽힌 공급망의 취약성을 실감하고 있다. 단순히 기름값이 오르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 손에 쥐는 물건들, 먹는 음식의 포장재, 병원에서 맞는 링거 백,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반도체까지—전쟁의 충격파는 예상치 못한 경로로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리터당 1,900원, 그리고 그 너머
지난 일요일, 서울 평균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1,900원을 넘어섰다. 정부가 두 번째 유류 가격 통제를 시작한 지 사흘 만이다. 구윤철 부총리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130달러까지 오를 경우, 현재 공공기관에만 적용 중인 차량 홀짝제를 민간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은 빙산의 일각이다. 더 조용하고, 더 광범위한 충격이 산업 전반에서 진행 중이다.
핵심은 나프타다. 플라스틱과 합성섬유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를 한국은 수요의 약 50%를 수입에 의존하며, 그 중 60%가 중동산이다. 전쟁 발발 이후 전체 공급량은 30% 가까이 줄었다. 수치로 보면 단순하지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훨씬 구체적이다. 식품 포장지, PET 병, 쓰레기봉투의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있고, 병원에서 쓰는 링거 백과 의료용 플라스틱 제품도 공급 불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까지 흔들리는 이유
전쟁의 파장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도 번지고 있다. 카타르의 액화천연가스(LNG) 시설이 공격을 받으면서 헬륨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헬륨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필수적인 냉각제로 쓰인다. 카타르는 전 세계 헬륨 공급의 약 30%를 담당한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현재 수개월치 재고를 확보한 상태지만,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이 완충재는 얇아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헬륨 수급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비료 생산 비용까지 오르면 식품 가격 상승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전쟁이 식탁 물가를 바꾸는 경로가 이렇게 복잡하다.
정부와 기업, 각자의 방정식
정부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는 '속도'와 '정밀함'의 균형이다. 차량 홀짝제를 민간으로 확대하는 방안은 에너지 절감 효과가 있지만, 생계를 차에 의존하는 자영업자나 지방 거주자에게는 전혀 다른 충격으로 다가온다. 서울과 지방, 대기업과 소상공인이 같은 정책을 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
기업들도 각자의 방정식을 풀고 있다.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대체 공급처 발굴이 시급하지만, 공급망 다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수년간 쌓아온 계약 관계와 물류 인프라를 단기간에 바꾸는 데는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업종별·기업별 수요를 정밀하게 파악해 에너지와 원자재 확보 계획을 맞춤형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투명한 정보 공개가 중요하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정보가 막히면 사재기와 패닉이 뒤따른다. 2020년 초 마스크 대란이 그 교훈을 남겼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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