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그린란드를 원했던 진짜 이유
1942년 히틀러의 그린란드 집착부터 현재 트럼프의 매입 시도까지, 이 얼음 덩어리가 강대국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이유를 파헤친다.
1942년 5월 21일 점심시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청년 시절을 회상했다. "어린 시절 나를 이토록 매혹시킨 인물은 거의 없었다." 그가 언급한 인물은 프리드요프 난센, 1888년 그린란드 내륙을 최초로 횡단한 노르웨이 탐험가였다.
히틀러의 개인 도서관에서 발견된 한 권의 책이 이 집착의 깊이를 보여준다. 1933년 출간된 알프레드 베게너의 그린란드 탐험기 『History of the Expedition』.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에는 선물 헌정사가 없었다. 즉, 히틀러가 직접 구매한 것이었다. 1933년, 그가 독일 총리가 된 바로 그 해에.
얼음 속에 숨겨진 전략 자원
히틀러의 그린란드 관심이 개인적 호기심에서 국가적 전략으로 바뀐 건 우연이 아니었다. 1934년 4월, 나치 정부는 그린란드를 면밀히 조사했다. 인구 1만 3,500명의 에스키모, 3,500명의 덴마크인, 8,000마리의 양.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최대 규모의 빙정석(cryolite) 매장량이었다.
빙정석은 미국 알루미늄 생산에 필수적인 광물이었다. 1938년 헤르만 괴링이 그린란드에 탐험대를 파견한 명목은 '동식물 연구'였지만, 탐험대를 이끈 건 광산 엔지니어 쿠르트 헤르데메르텐이었다. 과학이 아닌 경제가 진짜 목적이었던 셈이다.
당시 독일은 심각한 경제적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히틀러는 경제 자립을 위해 가혹한 관세를 부과하고 외채 상환을 거부했다. 특히 노르웨이산 고래기름 의존도를 줄이려 했는데, 문제는 고래기름이 마가린뿐만 아니라 군수산업 핵심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 생산에도 필수적이었다는 점이다.
연간 16만 5,000톤에서 22만 톤에 달하는 고래기름 수입은 독일 최대 외화 지출 항목이었다. 히틀러는 "독일 선박과 독일 어민, 독일 장비로 바다의 풍요로움을 수확해 외국에 한 푼도 주지 말자"며 독일 포경선단을 동원했다.
남극에서 그린란드까지, 확장하는 야망
1939년 1월, 두 대의 도르니에 수상기가 남극 연안을 따라 비행하며 15마일마다 나치 깃발이 달린 강철 막대를 투하했다. 괴링이 감독하고 독일 최고 극지 탐험가 알프레드 리처가 이끈 비밀 원정대의 임무는 "대독일의 경제적 이익 확장에 상응하는" 영토 주장이었다.
이는 히틀러의 평시 영토 확장 정책의 일환이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이어진 행보였다. 히틀러는 인권을 이유로 영토 획득을 반대하는 이들을 "글쟁이들"이라 일축했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국경은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바꾸는 것이다."
미국의 선제적 대응
1939년 폴란드 침공 후 히틀러의 북극 관심은 경제에서 군사로 확장됐다. 1940년 4월 8일, 히틀러는 요제프 괴벨스에게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브리핑했다. "약 25만 명의 병력이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며, "대부분의 포병과 탄약은 이미 석탄선에 숨겨져 수송됐다"고 설명했다.
다음 날 아침, 6개 보병사단과 2개 기계화여단, 공수부대, 186대의 하인켈 폭격기를 포함한 수백 대의 항공기가 '베저 기동작전'을 개시했다. 덴마크는 항복했고, 노르웨이는 저항했지만 분쇄됐다.
하지만 괴벨스가 모르는 사이, 미국 해안경비대 순양함들은 이미 그린란드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의 전략 분석에 따르면, 독일 U보트의 정확한 공격이나 파괴 공작만으로도 남그린란드 아르수크 피오르드의 이비투트 빙정석 광산이 무력화될 수 있었다. 미국 알루미늄 생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선제적 조치가 필요했다.
워싱턴 주재 덴마크 대사 헨리크 카우프만은 독일 점령하의 코펜하겐 정부와 거리를 두며 "자유 덴마크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를 즉시 인정했다.
fiction vs. 정당성의 경계
1941년 4월 9일, 독일의 덴마크 점령 정확히 1년 후, 코델 헐 미국 국무장관과 카우프만 대사는 그린란드 방위협정에 서명했다. 협정 전문은 그린란드가 "아메리카 대륙 국가들에 대한 침략 거점으로 전환될" 위험을 강조했다.
덴마크 외무장관 에리크 스카베니우스는 카우프만의 행동에 항의하며 이를 "fiction"이라 불렀다. "국가도 국가원수도 없는 사람"과 맺은 협정은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fiction'은 1년 전 영국이 샤를 드골을 '자유 프랑스' 대표로 인정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비시 정부가 드골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처럼, 나치 점령하의 코펜하겐은 카우프만을 반역죄로 기소했다.
미국과 영국은 무력에 의한 파시스트 장악과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특권을 구분했다. 드골이 프랑스의 정당한 대표로 인정받았듯, 카우프만도 덴마크와 그린란드의 정당한 대표로 인정받았다.
과거가 현재에 던지는 질문
이후 4년간 그린란드는 연합국의 핵심 중계기지가 됐다. 17개의 군사시설을 운영하며 이비투트 빙정석 광산을 보호하고, 수억 명의 유럽인 해방에 기여했다. 전쟁 후 덴마크 민주정부가 복원되자, 1951년 그린란드 방위협정을 자발적으로 재확인했다. 이 협정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80여 년 전 히틀러가 그린란드에서 본 것은 단순한 얼음 덩어리가 아니었다. 전략적 광물 자원, 군사적 요충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 패권을 좌우할 수 있는 지정학적 열쇠였다. 오늘날 기후변화로 북극 항로가 열리고 희토류 매장량이 재평가되면서, 그린란드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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