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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그린란드를 원하는 동안, 정작 그곳 주민들은 침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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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그린란드를 원하는 동안, 정작 그곳 주민들은 침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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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 인수 논란 속에서 5천 년간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온 이누이트족의 목소리와 자치권 투쟁의 역사를 조명한다.

57,000명. 그린란드 전체 인구다. 그 중 90%가 이누이트족이다. 하지만 트럼프와 덴마크, 유럽 지도자들이 그린란드 소유권을 두고 설전을 벌이는 동안, 정작 그곳을 5천 년간 터전으로 삼아온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칼랄리트(서부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투누미(동부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이누구이트(북부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이들은 자신들의 땅을 '칼랄리트 누나트(칼랄리트의 땅)'라고 부른다. 우리가 그린란드로 알고 있는 이 땅에서, 이들은 수십 년간 자치권 회복을 위해 싸워왔다.

5천 년의 터전, 1천 년의 지혜

5천 년 전부터 그린란드 북서부는 이 섬의 주요 관문이었다. 베링해협 지역에서 출발한 여러 토착 집단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며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에 정착했다.

1천 년 전, 현재 그린란드에 사는 이누이트족의 조상들이 이 땅에 도착했다. 그들은 혹독한 북극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교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약, 개썰매, 복잡한 작살, 나무나 뼈로 만든 눈 고글까지. 동물 털로 만든 의복은 모든 기상 조건에서 몸을 따뜻하고 건조하게 유지해주는 공학적 걸작이었다.

이 모든 도구와 의복에는 인간과 동물이 상호의존적이라는 그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누구이트 가족들은 변화하는 기후 속에서 사냥과 어업을 이어가고 있다.

동서에서 만난 두 문명

남부 그린란드 카시아르수크에서는 986년 에리크 더 레드가 첫 번째 노르드족 농장 브라탈리드를 세웠다. 아이슬란드로 소식을 보내 다른 이들의 합류를 독려했고, 수많은 노르드족 가족들이 뒤따라 목축업에 기반한 농장을 건설했다.

남쪽으로 확장하던 이누이트족은 노르드족 농민들과 마주쳤다. 교역도 했지만 관계는 때로 긴장됐다. 이누이트족 구전 역사와 노르드족 사가에는 폭력적 충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두 집단은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을 택했다. 노르드족은 정착 생활을 했지만, 이누이트족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섬과 만, 피오르드 주변에서 사냥했다.

14세기 초 소빙하기가 시작되고 북반구 기온이 떨어지자, 노르드족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의 정착지는 쇠퇴했고 1500년경 완전히 사라졌다. 반면 유연한 접근법을 택한 이누이트족은 육상과 해양 포유동물을 가용성에 따라 사냥하며 생활 방식의 큰 변화 없이 계속 살아갔다.

식민지배의 그림자

현재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에는 선교사 한스 에게데를 기념하는 논란의 동상이 서있다. 그는 1721년 루터교 선교부를 세우기 위해 이곳에 도착했고, 이 땅을 '고드호브'라고 불렀다.

1776년 덴마크 정부는 왕립 그린란드 무역부를 설립했다. 이는 그린란드 서안 지역사회를 150년간 폐쇄된 식민지로 관리하는 무역 독점 기구였다.

19세기에는 누크에 거주하는 일부 칼랄리트 가족들이 목사, 교육자, 예술가, 작가로 구성된 교육받은 도시 계층을 형성했다. 하지만 여전히 덴마크 식민주의자들이 통치했다.

한편 작은 연안 지역사회의 칼랄리트 가족들은 동물에 대한 존중과 자원 공유에 기반한 전통적 경제·사회 활동을 계속했다.

더 외진 동안과 극북 지역에서는 식민화가 더디게 진행됐고, 미국인 로버트 피어리나 덴마크계 그린란드인 크누드 라스무센 같은 탐험가와 상인들이 현지인들을 고용하고 교역할 수 있었다.

미국은 1916년 덴마크령 서인도제도(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를 구매하면서 덴마크의 그린란드 영유권을 공식 인정했다. 1921년 덴마크는 그린란드 전체에 대한 주권을 선언했고, 1933년 국제사법재판소가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그린란드 주민들은 이런 결정에 대해 전혀 상의받지 못했다.

세계대전이 가져온 변화

제2차 세계대전은 그린란드에 외부 세계를 끌어들였다. 덴마크가 나치 지배하에 있는 동안, 미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그린란드를 보호하는 책임을 맡고 동서안에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미군은 군인들과 칼랄리트족을 분리하려 했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고, 일부 방문과 교역이 이뤄졌다. 라디오와 방송 뉴스도 퍼졌고, 칼랄리트족은 자신들의 경계 너머 세상에 대한 감각을 갖기 시작했다.

냉전은 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 건설된 툴레 미공군기지 근처에 살던 27개 이누구이트 가족이 카낙으로 강제 이주당했고, 작은 목조 주택이 지어질 때까지 텐트에서 생활해야 했다.

자치권을 향한 긴 여정

1953년 덴마크는 헌법을 개정해 그린란드의 지위를 식민지에서 덴마크의 한 카운티로 변경했다. 이로써 모든 칼랄리트족이 덴마크의 정식 시민이 됐고, 처음으로 덴마크 의회에 선출직 대표를 보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덴마크는 동화 정책도 강화했다. 그린란드어인 칼랄리수트를 희생시키며 덴마크어와 문화를 장려했다. 그린란드 아이들을 덴마크의 기숙학교로 보내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1970년대 누크에서는 칼랄리수트 사용을 보호하고 그린란드 문제에 대한 더 큰 통제권을 원하는 젊은 칼랄리트 정치인들이 등장했다. 칼랄리수트로 저항 노래를 부르는 록밴드 '수메'는 정치적 각성에 기여했다.

1979년 그린란드 전체 주민투표에서 칼랄리트 유권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덴마크 왕국 내에서의 '자치정부'를 선택했다. 이는 선출된 칼랄리트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가 교육과 사회복지 같은 내정을 담당하되, 덴마크가 외교와 광물 자원 권리를 유지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덴마크로부터의 완전 독립 추진은 계속됐다. 2009년 자치정부는 자치권으로 대체됐는데, 이는 향후 그린란드 주민 투표를 통한 협상에 기반해 덴마크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명확한 경로를 제시했다. 자치권은 또한 그린란드가 광물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고 그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외교는 여전히 관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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