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총리가 말하는 '강대국 정치의 비극' 피하는 법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제시한 새로운 세계 질서 대응 전략. 힘의 정치 시대, 독일과 유럽이 선택한 길은?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최근 발표한 외교 정책 문서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유럽은 긴 '역사로부터의 휴가'를 끝냈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표현을 빌린 이 선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2026년 현재, 세계는 다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변화하는 세계 질서의 신호들
메르츠 총리가 진단하는 새로운 시대의 특징은 명확하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은 도전받고 있고, 권리와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변화의 가장 극명한 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국 역시 수십 년간 전략적 인내심을 발휘하며 세계 질서에 대한 영향력 확대 기반을 구축해왔다. 중국은 체계적으로 의존성을 만들어내고 국제 질서를 재해석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런 강대국 정치의 부활이 단순히 국가 간 경쟁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새로운 기술이 혁명적 변화를 이끄는 가운데 각국 사회 내부의 혼란과 불안이 강한 리더십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이 선택한 길: 현실주의적 자유 수호
메르츠 총리는 독일 외교안보 정책의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자유, 안보, 그리고 힘이다. 이 중에서도 자유가 최우선이고, 안보는 이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 경제적 힘은 자유를 번영시키는 도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자비에 맡겨진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형성할 수 있는 주체"라는 그의 말은 독일의 전략적 사고 전환을 보여준다.
실제로 독일은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2025년 6월 헤이그 NATO 정상회의에서 모든 동맹국이 GDP의 5%를 안보에 투자하기로 약속했고, 독일은 이를 위해 헌법까지 개정했다. 향후 몇 년간 독일 혼자서만 수천억 유로를 국방에 투자할 예정이다.
우크라이나 지원에서도 독일의 변화가 드러난다. 2025년 미국이 지원을 대폭 줄인 후, 유럽 NATO 동맹국들과 캐나다가 약 400억 달러의 안보 지원을 제공했는데, 독일이 단연 최대 기여국이었다.
유럽 통합의 새로운 의미
메르츠 총리는 유럽 주권 강화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자 오늘날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유럽 통합 방향은 기존과 다르다.
유럽 관료주의와 규제의 확산을 억제하고, 유럽의 기준이 글로벌 경쟁에서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혁신과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고, 투자를 장려하며, 창의성을 보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U 조약 42조 7항에 따른 무력 공격 시 상호 지원 의무를 실질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는 NATO를 대체하려는 게 아니라 동맹 내에서 자립적이고 강한 기둥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다.
한국이 주목해야 할 지점들
독일의 이런 변화는 한국에게도 시사점이 크다. 메르츠 총리가 지적한 "원자재, 기술, 공급망이 권력의 도구가 되는" 현실은 한국이 이미 체감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기술 분야에서 중국과의 의존성 문제, 그리고 미중 갈등 속에서의 선택 압박은 독일이 직면한 상황과 유사하다. 독일이 "일방적 의존성을 줄이는 공급망 구축"을 추진하는 것처럼, 한국도 경제 안보 차원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또한 독일이 강조하는 "파트너십을 통한 리더십"은 한국의 중견국 외교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면서도 동맹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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