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명이 추천한 책, 당신만 모르고 있었다
던전 크롤러 칼, 유튜브 페이스, 페어버즈 XL까지 — 인터넷 추천 루프가 우리의 취향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버지 뉴스레터 인스톨러 119호가 보여주는 디지털 큐레이션의 민낯.
"던전 크롤러 칼 읽어봤어?" 이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무시했다. 두 번째도. 세 번째쯤 됐을 때, 비로소 책을 펼쳤다.
이건 단순히 한 책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이 어떻게 취향을 만들고, 우리가 어떻게 그 흐름에 올라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추천이 쌓이면 결국 손이 간다
글로벌 테크 미디어 더 버지(The Verge)의 주간 뉴스레터 인스톨러119호는 흥미로운 고백으로 시작한다. 에디터 데이비드 피어스가 독자들의 반복 추천 끝에 마침내 던전 크롤러 칼(Dungeon Crawler Carl)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 "여러분이 그렇게 많이 추천했으니까"라는 이유 하나로.
던전 크롤러 칼은 매트 도빈스키(Matt Dobinskiy)가 쓴 리트RPG(LitRPG) 장르 소설이다. 지구가 외계인에 의해 거대한 던전으로 바뀌고, 평범한 남자와 그의 고양이가 생존을 위해 레벨을 올려가는 이야기. 게임 메카닉을 소설 속에 녹여낸 이 장르는 원래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먼저 폭발했고, 영미권에서는 아마존 킨들 언리미티드를 타고 퍼졌다. 지금은 레딧, 유튜브, 각종 팟캐스트에서 "읽어야 할 판타지 소설" 리스트의 단골이다.
중요한 건 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없다는 점이다. 서점 평대에도 없다. 오직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댓글에서 댓글로 퍼졌다.
'유튜브 페이스'가 알려주는 것
같은 뉴스레터에서 피어스는 유튜브 페이스(YouTube Face)도 언급한다. 유튜버들이 썸네일에서 짓는 그 과장된 표정 —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뭔가 충격받은 듯한 얼굴. 이 표정은 클릭률을 높이기 위해 알고리즘이 사실상 강제한 표현 방식이다.
던전 크롤러 칼의 바이럴 경로와 유튜브 페이스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플랫폼이 콘텐츠의 형태를 결정한다. 유튜브는 썸네일 표정을 바꿨고, 킨들 언리미티드와 레딧은 소설의 장르 문법을 바꿨다. 독자가 원하는 게 아니라, 알고리즘이 노출시켜주는 게 "인기"가 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 네이버 시리즈와 카카오페이지의 웹소설 랭킹 시스템은 특정 장르 — 회귀물, 빙의물, 헌터물 — 를 압도적으로 키웠다. 플랫폼의 노출 알고리즘이 독자의 취향을 만들었는지, 독자의 취향이 알고리즘을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닭과 달걀의 문제다.
큐레이터의 시대, 그런데 누가 큐레이터인가
인스톨러 뉴스레터 자체도 하나의 큐레이션이다. 페어버즈 XL 헤드폰 테스트, 옵시디언(Obsidian) 설정 재구성, 맥북 네오 구매 — 에디터의 일상이 곧 독자의 쇼핑 리스트가 된다. 119개의 에디션을 쌓아온 이 뉴스레터가 가진 힘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신뢰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 책이든, 헤드폰이든, 앱이든 — 은 정말 우리가 찾아낸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추천 루프에 올라탄 걸까?
네이버, 카카오, 유튜브,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은 우리가 "좋아할 것 같은" 콘텐츠를 먼저 보여준다. 그 결과 취향은 점점 더 비슷해지고, 바이럴은 더 빠르게 퍼진다. 던전 크롤러 칼을 수백만 명이 동시에 "발견"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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