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업, 계약보다 국가가 먼저다
미국 의회에서 추진 중인 반도체 법안이 기업의 기존 계약을 정부 명령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삼성·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에 직접적 영향이 예상된다.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 수조 원을 투자하고, 고객사와 수년치 공급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가 "그 물량, 우리가 먼저 쓴다"고 통보한다면?
미국 의회에서 검토 중인 반도체 관련 초안 법안이 바로 그런 상황을 법적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정부가 반도체 기업의 기존 민간 계약을 사실상 무효화하거나 우선순위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직 확정된 법률이 아니지만, 반도체 업계는 이미 긴장하고 있다.
법안이 담고 있는 것
해당 초안의 핵심은 '정부 우선 접근권(government priority access)'이다. 특정 조건—주로 국가 안보 또는 공급망 위기—이 충족될 경우, 연방 정부가 반도체 제조사에게 민간 고객 납품을 미루고 정부 수요를 먼저 충족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이 현실화되면 파장은 단순하지 않다.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는 고객사에 대한 계약 불이행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위약금·손해배상 책임이 생긴다. 법안은 이 경우 정부가 일정 부분 보상하는 메커니즘을 포함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보상 범위와 조건은 여전히 불명확하다.
표면적으로는 방산·의료 등 핵심 분야의 칩 확보를 위한 안전망처럼 보인다. 하지만 업계는 이 조항이 평시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국가 안보'의 정의가 어디까지인지에 따라 정부 개입의 범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삼성·SK하이닉스, 남의 일이 아니다
이 법안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 내 생산 시설을 보유하거나 건설 중인 외국 기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에 170억 달러(약 23조 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HBM 패키징 시설 투자를 확정했다. 두 기업 모두 미국 CHIPS Act 보조금을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다.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라면 이 법안의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 기업들이 이미 글로벌 고객사—엔비디아, AMD, 애플, 퀄컴 등—와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가 우선 공급을 요청할 경우, 한국 본사의 경영 판단과 무관하게 미국 현지 법인이 계약 이행 순서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기업 vs. 국가: 공급망의 새로운 규칙
이 법안은 더 큰 흐름의 일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세계는 반도체 공급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체감했다. 자동차 회사들이 칩 부족으로 생산 라인을 멈추고, 가전 납기가 수개월씩 밀렸다. 그 경험이 각국 정부로 하여금 "공급망은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미국만이 아니다. 유럽연합은 European Chips Act를 통해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려 하고 있고, 일본은 TSMC 구마모토 공장 유치에 국가 보조금을 쏟아부었다. 중국은 반도체 자립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삼은 지 오래다.
하지만 "정부가 기존 계약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조항은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책이 '어디에 공장을 짓느냐'를 유도하는 당근이었다면, 이번 법안은 '무엇을 누구에게 파느냐'까지 통제하려는 채찍에 가깝다.
반도체 업계의 반발은 예상된 수순이다. 기업들은 계약의 예측 가능성이 흔들리면 장기 투자 결정 자체가 어려워진다고 주장한다. 오늘 체결한 공급 계약이 내일 정부 명령 하나로 뒤집힐 수 있다면, 고객사들도 주문을 분산하거나 공급선을 다변화하려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급망 안정을 위한 법이 공급망 불안정을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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