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된 국제질서, 이제 바꿀 때인가?
2026년 뮌헨안보보고서가 지적한 '파괴구 정치' 시대. 1945년 체제가 무너지는 가운데,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가 필요한 시점일까?
80년. 현재 국제질서가 만들어진 지 흐른 시간이다. 2026년 뮌헨안보보고서는 이 순간을 '파괴구 정치(wrecking-ball politics)'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1945년 전후 질서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정말 파괴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시대에 뒤처진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과정일까?
철과 곡물의 시대에서 데이터의 시대로
1945년 체제는 양극 체제와 후에 미국 패권으로 설계된 시스템이었다. 당시 세계는 철강과 곡물, 그리고 영토 주권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오늘날 가치 창출과 시스템 리스크는 국경과 섹터를 초월한다. 데이터 흐름, 인공지능, 국경을 넘나드는 플랫폼, 그리고 글로벌 통합 자본시장이 새로운 게임의 룰을 만들고 있다. 기후변화, 디지털 분열, 공급망 불안정, 부채 위기, 지정학적 경쟁 같은 문제들은 80년 전 설계된 틀로는 해결할 수 없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급망이 대만 해협 긴장에 좌우되고, 현대자동차의 전기차 전략이 미중 배터리 패권 경쟁에 영향받는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서구 주도 질서의 한계
20세기 후반은 서구의 주도 하에 보편적 원칙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하지만 이는 점점 사라져가는 영향력의 비대칭성과 이러한 아이디어를 전심으로 지지하는 국가들에 의해 뒷받침됐다.
문제는 다자간 기구들이 여전히 과거의 권력 분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구성을 보라. 1945년 승전국들이 여전히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경제력이 급성장했지만, 국제기구에서의 발언권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서구 국가들에서 부상하는 포퓰리즘은 국가 번영을 가로막는다고 여겨지는 다자간 구조를 해체하려 한다. 브렉시트가 그 대표적 사례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시절 국제기구 탈퇴 움직임도 같은 맥락이었다.
협력의 새로운 동력
그렇다고 모든 것이 파괴만 되고 있는 건 아니다. 국제적 긴장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여전히 공통 이익에 기반한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파리협정, 코로나19 백신 공유를 위한 코백스 이니셔티브, 그리고 최근 AI 안전성을 논의하는 다양한 국제 포럼들이 그 증거다.
한국 역시 이런 흐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K-배터리 동맹, 반도체 4개국 협의체, 그리고 최근 AI 거버넌스 논의에서 한국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전통적인 서구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실용적 협력을 추구하는 새로운 패턴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권력의 지형
경제적으로는 더 이상 한두 국가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중국의 부상, 인도의 성장, 그리고 중견국들의 영향력 확대가 권력을 분산시키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플랫폼 기업들이 국가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환경적 제약도 새로운 변수다. 탄소 국경세, ESG 투자, 그리고 지속가능성 기준들이 국제 경제 질서의 새로운 축이 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이미 이런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RE100 참여,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이 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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