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협상 뒤에 숨은 군함들
미국-이란 제네바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페르시아만에 집결한 미 해군 함대. 협상 테이블 아래 숨겨진 군사적 압박의 진짜 의미는?
협상 테이블에서는 평화를 논하지만, 페르시아만에는 군함이 집결하고 있다. 2월 17일 제네바에서 열린 미국-이란 2차 협상에서 이란에게 2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기대에 부응하는 제안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목격하고 있는 것은 외교적 돌파구가 아니라, 긴장의 새로운 국면이다.
협상장 밖의 또 다른 메시지
제네바 회담장에서 양측 대표들이 악수를 나누는 동안, 미 해군 제5함대는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함대를 전개하고 있었다. USS 니미츠 항공모함 타격단을 비롯해 12척의 주요 전투함이 이란 연안에서 불과 200해리 떨어진 지점에 배치됐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외교사에서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라 불리는 전통적 압박 수단이다. 협상 테이블에서는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면서도, 군사적 옵션이 언제든 준비되어 있음을 상대방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란 역시 이에 맞서 혁명수비대 해군이 고속정 50여 척을 호르무즈 해협에 집결시켰다. 페르시아만이 좁은 수로라는 지리적 특성상, 소형 고속정들의 떼 공격(swarm attack)은 대형 군함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다.
에너지 시장이 보내는 신호
군사적 긴장은 즉시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 반영됐다.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가격은 배럴당 78달러에서 83달러로 6.4% 급등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전 세계 석유 공급량의 21%가 운송되기 때문이다.
한국에게는 더욱 민감한 문제다. 우리나라 원유 수입량의 70% 이상이 중동산이며, 이 중 상당 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온다. 유가 상승은 곧바로 국내 물가와 제조업 경쟁력에 직격탄이 된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같은 조선업체들은 이미 중동 발주처들로부터 선박 인도 일정에 대한 문의를 받기 시작했다. 해상 운송 리스크가 높아지면 보험료 상승과 함께 물류비 전반이 오를 수밖에 없다.
협상의 진짜 딜레마
제네바 협상에서 핵심 쟁점은 이란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다. 현재 이란은 20% 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90%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지만, 민간용 3.67%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이 농축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기존 농축 우라늄을 제3국에 이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이란은 경제 제재 완전 해제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문제는 양측 모두 국내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강한 미국'을 어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메네이 최고지도자 역시 강경파들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양보는 곧 정치적 약점으로 비춰질 수 있다.
역사가 말하는 패턴
흥미롭게도 미국-이란 관계사를 돌아보면, 가장 극한 대립 국면에서 오히려 돌파구가 마련되는 경우가 많았다. 1979년 인질 사태 이후 444일 만에 극적 타결이 이뤄졌고, 2015년 핵 합의(JCPOA) 역시 제재가 절정에 달했던 시점에서 성사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이란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중동 지역 내 세력 균형도 2015년과는 달라졌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관계 개선, 이스라엘의 새로운 안보 우려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중국 경쟁 구도 속에서 이란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에너지 안보와 동맹 관계, 경제적 실익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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