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가 막히자, 러시아가 웃는다
이스라엘·미국의 대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러시아가 중국·인도 에너지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기회를 맞고 있다. 한국 에너지 수급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세계 원유 공급의 20%, LNG 교역의 30%가 지나는 해협이 사실상 닫혔다. 이란의 공격 위협으로 주요 선사들이 호르무즈 해협 운항을 중단한 지금, 가장 조용히 미소 짓는 나라는 중동의 어느 산유국도 아니다. 바로 러시아다.
위기의 지도: 누가 얼마나 다쳤나
이스라엘·미국의 대이란 군사작전이 본격화되면서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의 교전 구역이 됐다.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유일한 해상 통로인 이 해협이 막히자, 아시아 최대 에너지 수입국들은 즉각적인 충격에 노출됐다.
중국의 피해가 가장 크다. 전체 원유 수입의 약 40%, LNG 수입의 30%가 호르무즈를 통과한다. 인도는 더 심각하다. 원유 수입의 절반에 달하는 하루 약 250만~260만 배럴이 이 해협에 의존하고 있고, LNG 수입의 50% 이상이 카타르·UAE에서 온다. 한국·일본 역시 중동산 LNG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이 길목에 의존한다. 단기적으로는 유가 급등, 운임·보험료 폭등, 무역수지 악화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 위기가 러시아에는 다른 의미로 읽힌다.
제재로 흔들리던 러시아, 위기를 기회로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에너지 산업은 서방 제재의 직격탄을 맞았다. 2025년 초 미국은 역대 최강의 에너지 제재를 단행해 로스네프트, 루코일을 포함한 주요 생산자와 180개 이상의 유조선·서비스 기업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EU는 2027년 말까지 러시아 가스 수입을 전면 차단하는 로드맵을 확정했다.
그 결과 러시아의 해상 원유 수출은 2025년 하루 약 430만 배럴에서 2026년 2월 약 280만 배럴로 급감했다. 인도 정제업체들이 미국 압박에 굴복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줄이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핵심 LNG 프로젝트인 Arctic LNG-2도 제재와 기술 부족으로 가동에 차질을 빚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르무즈 위기가 터진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이 위기는 두 가지 즉각적 이득을 가져다준다. 첫째, 국제유가 상승으로 연방 재정이 숨통을 튼다. 둘째, 대안 공급처를 찾는 중국·인도가 제재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러시아산 에너지를 계속 구매할 유인이 커진다.
'아시아 피벗'의 가속 페달
러시아의 장기 에너지 전략은 유럽에서 잃은 시장을 아시아에서 되찾는 것이다. 그 핵심 인프라가 중국으로 이어지는 시베리아의 힘 1 파이프라인이고, 현재 협상 중인 시베리아의 힘 2(몽골 경유)다. 북극해 항로를 연중 가동 가능한 수출 통로로 개발하는 계획도 이 전략의 일환이다.
호르무즈 위기는 이 전략에 논리적 가속 페달을 밟아준다. 중국은 해상 공급망의 취약성을 절감하면서 육상 파이프라인과 북극 루트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된다. 인도는 미국의 제재 압박을 받으면서도 중동 공급 차질이 길어질수록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 할인 매력을 외면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최근 러시아와 중국은 '동방 루트' 공급량 확대 합의를 이끌어냈고, 이란 위기는 모스크바에 가격·물량 협상에서 새로운 카드를 쥐여줬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중동을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서시베리아 유전은 노후화되고 있고, 극동 수출 터미널의 처리 용량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제재로 인한 기술·금융 접근 제한은 신규 개발을 늦추고 있다. 러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대체'가 아니라 '구조적 비중 확대'다.
한국은 어디에 있나
한국도 이 지형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가스공사와 민간 정유사들은 중동, 특히 카타르·UAE산 LNG와 원유에 크게 의존한다.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에너지 수입 비용 상승은 물가와 무역수지에 직접적 압박을 가한다.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러시아-중국-인도의 에너지 삼각 관계가 공고해질수록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구조 자체가 바뀐다. 서방 주도의 에너지 질서와 '비서방 블록'의 에너지 질서가 병존하는 세계에서, 한국은 어느 편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미국과의 동맹 관계상 러시아산 에너지를 공개적으로 확대하기 어렵지만,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공급 다변화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현대오일뱅크,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등 국내 정유사들이 이미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미국산 셰일오일 등 대안 공급처를 확대해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LNG 부문은 장기 계약 구조상 단기 전환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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