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스 2026, 규칙 기반 질서의 장례식장이 되다
다보스 포럼에서 드러난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 규칙에서 거래로, 원칙에서 힘의 논리로 이동하는 세계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47%의 글로벌 리더들이 현재 국제질서가 "근본적 위기"에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2026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이 수치가 현실이 되었다. 세계 정치·경제 지도자들이 모인 이 자리는 마치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부고를 읽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이번 포럼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누구도 기존 질서의 복원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모든 이들이 인정했다. 지금 우리는 질서가 "재협상"되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고.
규칙에서 거래로: 질서의 근본적 전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은 이런 전환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관세, 거래, 전략적 지리를 외교의 주요 도구로 제시했다. 흥미롭게도 그의 세계관에서 주권은 절대적이지 않다. 능력을 통해 "획득하고 방어해야 하는" 조건부 개념이었다.
그린란드 문제는 이런 논리의 상징이 됐다. 영토 문제를 법적 절대치가 아닌 "협상 가능한 전략 자산"으로 프레이밍했고, 경제적 압박을 정당한 수단으로 제시했다.
반면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이런 거래적 전환이 규칙 기반 질서의 "사실상 종료"를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주권과 영토 보전이 협상 불가능한 기준선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국제적 정당성 자체가 붕괴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가 목격하는 건 완전히 무정부적이지도, 완전히 규칙에 묶이지도 않은 새로운 질서다. 어떤 이슈에는 규칙이, 어떤 이슈에는 거래가 적용되는 "선택적 준수"의 시대. 바로 이 모호함이 현재 불안정성을 정의한다.
미국, 유럽, 아시아의 서로 다른 질서관
다보스 2026은 더 이상 하나의 통합된 서구적 입장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시켜줬다. 대신 세 개의 서로 다른 질서 비전이 등장했다.
미국의 도구적 비전은 노골적으로 실용적이다. 질서를 도덕적 틀이 아닌 성공적 거래의 부산물로 본다. NATO조차 신성불가침한 제도가 아닌 부담 분담과 무역 수지에 따라 협상 가능한 약정으로 여긴다. 우크라이나는 "끝까지 지켜야 할 원칙"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됐다.
유럽의 대응은 오히려 경화됐다. 우르술라 폰 데어 라이엔과 안토니오 코스타는 모두 주권과 국경이 거래 대상이 아닌 토대라고 강조했다. 전략적 자율성은 이제 생존 필수 요건으로 재정의됐다. 제재, 방산 역량, 반강압 수단이 유럽 안보 독트린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강자의 법칙"으로의 추락을 경고했고,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강대국 정치의 복귀가 중소국가들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유럽에게 힘 없는 원칙은 불충분하며, 질서는 이제 물질적이고 적극적으로 방어되어야 한다.
아시아의 비전은 워싱턴도 브뤼셀과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허리펑 중국 부총리는 중국을 세계화와 다자 경제 협력의 수호자로 제시하며 일방주의와 제로섬 사고를 경계했다. 하지만 베이징의 주권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추상적이었다. 우크라이나나 북극 분쟁 같은 서구의 갈등 해석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존중과 비강압을 강조했다.
이런 모호함은 중국이 대서양 양안의 변동성 속에서 자신을 "안정적 축"으로 포지셔닝할 수 있게 해준다.
주권 개념 자체가 전쟁터가 되다
다보스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주권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정의에서가 아니라 적용에서 말이다.
유럽과 캐나다에게 주권은 여전히 불가분의 개념이다. 영토 보전은 국제적 정당성의 기반석이며, 우크라이나든 그린란드든 어떤 침식이라도 전체 시스템을 약화시키는 선례가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미국에게 주권은 안보 능력과 분리될 수 없다. 국가안보가 발동되면 전략적 지리가 전통적 레드라인을 넘어설 수 있다. 이 논리는 주권을 부정하지 않지만 상대화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런 불안을 특히 명확하게 포착했다. 평화가 주권을 거래하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리트머스 테스트다. 강압을 통해 국경이 다시 그어질 수 있다면 유럽의 전체 안보 구조가 공허해진다.
한국이 주목해야 할 지점들
이런 국제질서의 재편이 한국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한미동맹의 재정의 가능성이다. 트럼프의 거래적 접근법은 동맹을 부담 분담과 무역 수지의 관점에서 재평가할 수 있다.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과 무역 흑자가 동맹의 지속성과 직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 중국과의 관계 재설정이다. 중국이 "안정적 축"을 자처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더욱 정교한 균형 외교를 펼쳐야 한다. 특히 대만 문제에서 한국의 입장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셋째, 유럽과의 협력 확대 기회다.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는 한국과의 협력을 확대할 동인이 될 수 있다. 반도체, 배터리, 방산 분야에서 "민주주의 공급망" 구축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기회인가, 위험인가?
다보스는 이런 분열된 순간이 유럽-아시아 협력에 기회를 창출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는 아시아와의 탈동조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변화라는 명목 하에 더 많은 협력을 요구한다.
유럽-인도 협력이 가장 유망한 축으로 떠오른다. 강압에 대한 공통 우려, 공급망 회복력, 다극 안정성에 대한 공유된 관심이 기반이다. 인도의 전략적 자율성은 이분법적 블록보다는 유럽의 균형 추구와 더 편안하게 조화된다.
유럽-중국 관계는 더 양면적이다. 경제 협력과 기후 공조는 불가피하지만, 특히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주권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더 깊은 전략적 신뢰를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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