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깨달은 냉혹한 현실, '법보다 힘이 세다
다보스 포럼에서 유럽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인정한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종말. 그린란드 사태가 보여준 새로운 세계의 모습과 유럽의 대응 전략을 분석한다.
지난 주 스위스 다보스의 눈 덮인 산봉우리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유럽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속삭여지던 이야기를 마침내 공개적으로 꺼냈다. 현대 유럽을 떠받쳐온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유럽 지도자들은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진짜 안도감은 다른 곳에서 왔다. 그동안 사적인 자리에서만 논의되던 불편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해방감에서 말이다.
그린란드가 보여준 새로운 게임의 룰
그린란드 사태는 유럽에게 하나의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법이 더 이상 권력을 안정적으로 제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시되던 현실이었지만, 유럽은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나토 사무총장 마크 뤼테와의 회담에서 나온 해결책은 이런 새로운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린란드 내 미군 기지를 주권 영토로 지정하고 트럼프가 관련 관세 위협을 철회하도록 하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국제법 원칙보다는 실용적 타협이 우선된 것이다.
트럼프는 다보스에서 길고 산만한 연설을 통해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거나 관세를 내라"고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규칙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대의 신호탄이었다.
유럽의 뒤늦은 각성
다보스 무대에 선 유럽 지도자들은 연이어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이 의존해온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에게는 충격적인 인정이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에게는 이미 수년간 경험해온 현실이었다.
유럽연합은 70년 넘게 다자주의와 국제법을 기반으로 한 질서 속에서 번영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강대국 경쟁의 시대에 직면했다. 중국의 부상, 러시아의 공격성,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현실 말이다.
힘의 균형이 바뀐 세계
이런 변화는 단순히 미국의 정책 변화 때문만이 아니다. 글로벌 권력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중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려 하고, 러시아는 전통적 세력권 회복을 추진한다. 중간 규모 국가들도 더 이상 기존 강대국의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한국도 이런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한국 기업들은 이미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최전선에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반도체 수출 통제, 공급망 재편, 기술 동맹 구축 등 모든 것이 경제 논리보다는 지정학적 고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유럽의 선택지
유럽은 이제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했다. 새로운 강대국 경쟁 시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제3의 극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일부 유럽 지도자들은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며 독자적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기술, 안보 모든 면에서 다른 강대국에 의존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선택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유럽의 선택지는 더욱 제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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