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실재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의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정면으로 반박한다. 의식은 자연을 초월하는가, 아니면 자연의 일부인가. 이 논쟁이 지금 중요한 이유.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느끼는 그 ‘느낌’ — 눈에 들어오는 검은 글자들, 이해가 되는 순간의 작은 만족감 — 이것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아니면 영원히 설명 불가능한 무언가일까?
이 질문을 둘러싼 논쟁이 학계를 넘어 AI 연구자, 철학자, 신경과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30년 전 한 철학자가 던진 개념 하나가 있다.
‘어려운 문제’라는 이름의 함정
1994년,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는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한 강연을 통해 의식 연구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그는 의식에 관한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눴다.
첫 번째는 뇌가 어떻게 행동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어떻게 내면 상태를 보고하는지를 설명하는 문제다. 차머스는 이것을 역설적으로 ‘쉬운 문제’라고 불렀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원칙적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보았다.
두 번째가 핵심이다. 왜 뇌의 물리적 과정이 ‘경험’을 동반하는가. 빨간색을 볼 때 단순히 특정 파장의 빛이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빨간색다움’이라는 주관적 느낌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차머스는 이것을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라 명명했고, 이 문제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원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개념은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신경과학자, 철학자, 심리학자들이 앞다퉈 ‘설명적 간극(explanatory gap)’을 논하기 시작했다. 의식은 물질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라는 생각이 학문적 외피를 입고 부활했다.
그런데 최근 이 논리 전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들은 ‘어려운 문제’ 자체가 잘못 설정된 질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왜 이 논쟁에 끌리는가
반박의 핵심은 역사적 패턴에서 시작된다.
다윈이 인간과 동물이 공통 조상을 가진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격렬히 저항했다. 당나귀와 같은 가계도를 공유한다는 생각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하늘과 땅이 같은 물리 법칙을 따른다는 주장이 불경스럽게 여겨졌다. 근대 생물학이 생명체와 무생물이 본질적으로 같은 화학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밝혔을 때도 저항이 있었다.
의식 논쟁은 이 계보의 최신판이다. ‘우리의 영혼이 뇌라는 물질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논증에 끌린다.
중세 서양에서 인간은 몸과 영혼이라는 두 개의 분리된 실체로 이루어진다고 여겨졌다. 영혼은 초월적 세계에 속하며, 기억과 감정과 주관성의 저장소였다. 신이 창조한 불멸의 실체였다. 이 관념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자아 개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가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것은, 그것이 이 오래된 직관 — 영혼은 물질과 다르다 — 을 현대 철학의 언어로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반박론자들의 핵심 주장이다.
‘철학적 좀비’의 자기모순
차머스는 ‘철학적 좀비’라는 사고 실험을 제시한다. 외모와 행동이 인간과 완전히 동일하고, 감정과 꿈과 경험을 보고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내적 경험이 없는 가상의 존재다. 이런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적 경험이 물리적 행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임을 증명한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 논증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철학적 좀비는 ‘나는 의식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과 경험적으로 구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좀비의 뇌 속 물리적 과정이 좀비로 하여금 자신이 의식이 있다고 확신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내 의식에 대한 나 자신의 확신을 신뢰할 수 있는가? 만약 내가 좀비라면, 나는 의식이 없으면서도 의식이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이 논증은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더 근본적인 반박은 이렇다. 과학은 외부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신의 시선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 역시 세계 안에 있는 존재가, 세계 안에서 만들어낸 관점이다. 우리는 세계 밖에 서서 의식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 세계의 일부다.
‘설명적 간극’이 생겨나는 이유는 의식이 물리적 현상과 다른 종류이기 때문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을 ‘세계 외부에서 세계를 서술하는 객관적 그림’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 오해를 전제로 깔면, 당연히 주관과 객관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생긴다. 간극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간극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
영혼은 실재한다, 빼기(subtraction)로서
그렇다면 의식과 영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로벨리의 제안은 이렇다. 정신적 과정은 물리적 과정을 더하기(addition)가 아니라 빼기(subtraction)로 서술한 것이다. 완전한 물리적 기술에서 두드러진 특성만 추려낸 것이 우리가 ‘마음’이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방 테이블을 생각해보자. 테이블은 원자들의 집합이다. 그렇다고 테이블이 허상이 되지는 않는다. 테이블은 실재한다. 다만 그것은 원자 수준의 서술이 아닌, 더 높은 수준의 언어로 서술될 때 의미를 갖는 현상이다. 자전거가 고장났을 때 입자물리학자가 아니라 자전거 수리공을 부르는 것처럼.
영혼도 마찬가지다. 영혼은 뇌의 물리적 과정을 다른 언어로,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같은 사건을 뇌를 가진 당사자가 경험하는 것과,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은 다르게 보인다. 이것은 두 가지 다른 현실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일몰을 생각해보자. 고대인들은 태양이 지구 위를 운동하며 내려가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태양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현상임을 안다. 이 이해의 갱신이 일몰을 비실재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일몰은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실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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